우리들의 이야기

유학의 흐름과 교회의 역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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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18:37 1,08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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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 장로교가 분열한 이유는 다양했다. 이에 대해 비판적 고찰이 필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이 분열은 다른 교단를 생성하여 특성있는 발전을 해온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즉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교단측, 신신학의 수용문제로 기장측, 그리고 W.C.C. 연합기관의 가입문제로 통합과 기장측이 각각 분열되었다. 이 분열과정에서 지역적으로 결집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지역성 결집’의 상승작용으로 복음이 더 활발하게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의 지역성은 유학에 따른 특징으로 그 구분이 가능하다. 즉 퇴계 이황의 이(理)는 경상좌도(경북), 남명 조식의 의(義)가 경상우도(경남), 율곡 이이의 기(氣)가 호남에 각각 영향을 주었다.
이번에는 호남의 기의 특징을 살펴보고 다음에 영남의 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기의 특징은 ‘현상학적 경험에서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의 문제가 주를 이룬다. 기는 사물의 재료를 뜻하는 것으로서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기의 이런 특성, 즉 토양에서 복음을 수용한 호남에서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본 필자의 주된 관심이다.
우리나라 복음의 수용에서 본다면 천주교는 북학파에서 《천주실의》등 서적을 통하여 안정복 이익이 실천철학으로 연구하여 신앙이 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775년부터 경북 소백산맥 아래 순흥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홍유한을 시작으로 경기도와 서울 명동을 거쳐 호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신앙생활에서 첫 순교자는 전주에서 폐제사 문제로 1791년 윤지충이 전주 전동성당에서 참수되어 첫 순교자가 되었다.
개신교는 북방과 남방루트를 통해서 복음을 수용하였다. 서상륜등이 장연을 거쳐 북방선교루트를 통하여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남대문에 정착함으로써 선교가 시작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남방루트를 통하여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부산을 거쳐 영남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처럼 복음 수용은 이의 본질을 중심으로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말하는 영남지역에서 호남지역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현상학적 경험에서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현실적 측면을 강조했던 호남지역에서 먼저 신앙의 실천으로서 순교가 나타났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산하 순교자기념선교회가 한국관광공사 후원으로 제작한 한국교회 순교유적지 순례프로그램이 있다. 그 프로그램은 순교지를 선정하고 답사하는 목적을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초기의 신앙과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지키려했던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순교유적지가 호남지역은 6.25 전쟁시 77명이 순교한 영광 염산교회, 65명이 순교한 염산 야월교회, 논산 병촌교회 66인 순교탑, 정읍 두암교회 23인 순교탑, 무안 해제 중앙교회 5인 순교비, 영암 영암읍교회 24인 순교비, 구림교회 18인 순교비, 상월교회 25인 순교비, 강진읍교회(배영석 목사), 여수덕양교회(조상학 목사)가 있다.
그에 비해 영남지역은 진해 웅천교회(주기철 목사 생가)안강 육통교회(심능양 장로), 청송 화목교회(엄주선 강도사)정도가 있다. 이와 같이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의 순교 현장이 확연하게 다른 특성을 보인다.
순교현장이 호남지역으로 편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남과 다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남지역은 여러곳에서 한 교회의 수십 명이 동시에 순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남지역에서는 이런 순교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남지역에서는 한명이 순교하여 믿음의 표상으로 나타나지만, 한 교회나 한 공동체가 동시에 순교한 지역은 찾기 어렵다.
혹자는 이런 호남 지역의 특징은 6.25 전쟁에서 점령지역이었기 때문이고도 한다. 즉 영남지역은 낙동강 방어선을 중심으로 공산군의 남하가 저지되었던 것에서 비롯된 차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으로 영남이 점령지역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한 장소에서 다수가 순교한 호남지역과 그렇지 못한 영남지역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호남 지역의 기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실천적 차원에서 역동은 목회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호남지역에서 청빈한 수도자 최흥종 목사(1880-1966)가 있다. 그는 1904년 기독교를 접하고 의병을 진압하는 치안관리인 순검(巡檢)을 접고 최영종에서 최흥종으로 개명을 하고 광주제일교회 새예배당 헌당식에서 세례를 받았다.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가 나병에 걸린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는 것에 감명을 받고 나병환자를 돕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후 최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3.1 만세운동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졸업하였다. 3.1운동이후 일제가 문화정책을 표방하자 노동자 상호간의 유기적 결합을 위한 사회단체인 노동공제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22년 그는 북문밖 교회를 사임하고 시베리아 선교를 위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나 1년간 선교하는중 블라디보스톡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여 금정교회에 부임하였다. 1926년에 최 목사는 다시 시베리아 선교를 떠났다가 선교금지령 위반과 불법 월경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귀국 후에는 그는 교회를 맡지 않고 신간회 광주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929년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여 목회기간동안 제주노회를 창립하였다.
1931년부터 최목사는 나병구제연구회와 나병단체연합회를 설립하였으며 1935년에 거세를 하고 1937년 1월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아는 사람에게 보내면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다. 해방을 맞이하며 최 목사는 공직을 사양하고 6.25전쟁이후 나환자들과 지내며 회개와 믿음,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진실된 삶을 살 것을 권면하면서 1966년 2월 10일 금식기도하면서 지내다가 5월 14일 별세하였다. 그를 기억한 이들이 전라남도 사회장으로 나환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슬픔 속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루었다.
최흥종 목사의 호는 오방(五放)으로 가정, 사회, 사업, 국가, 종교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초연하겠다는 표현이었다. 이처럼 실천적인 그의 신앙은 삶의 현장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공간적으로는 광주와 시베리아, 제주도 그리고 삶의 현장은 교회와 나환자사업, 노동운동까지 넓혔다. 이 모두의 근간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그 성령의 역사는 호남지역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유학의 기가 그런 열매를 위한 밭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관심대로 유학의 기(氣)는 호남 지역에서 복음은 실천적인 신앙으로 순교를 감당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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