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흐름과 교회의 역사 5(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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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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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대 장로로 본 영남(0805)
지난 호에서 호남지역에 기독교 순교자가 집중된 이유를 호남지역의 기(氣)의 특성, 즉 ‘현상학적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영남지역의 이(理)의 특징인 본질에서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찾는 측면에서 3대 장로가 그 지역에 집중된 이유를 검토하면서 필자의 연구 주제인 “유학에서 찾은 교회의 성장”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영남지역이 호남지역보다 복음화율이 낮은 이유가 유교의 영향 때문이라는 단순한 설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영남지역이 호남지역보다 복음화율이 낮은 이유는 유교를 수용한 토양의 차이 즉 영남의 지역적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남 지역에서는 믿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기의 역동성이 순교로 나타났다. 이에 비하여 영남지역은 이의 본질을 중시하기에 믿음이 나타나는 현상을 예로 들기가 어려웠다. 영남지역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호남의 순교처럼 분명하게 드러낼 특징적인 것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필자가 우리 교단 전국장로회연합회의 창립40년사를 집필하던 중에 영남의 특징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영남지역에서 믿음을 지키는 방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조부(祖父)-부(父)-자기(自己)로 이어지는 ‘3대 장로신앙’이라는 점이다.
영호남의 지역적 신앙형태의 차이를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유교의 사유체계가 양 지역에서 다르다는 것을 별견하게 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영남지역의 복음화율은 인구대비 10-13%의 비율이지만 호남지역은 19-26%의 비율로 나타난다면 ‘3대장로’의 비율이 당연히 영남지역보다 호남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3대 장로를 처음 시상하기 시작한 1976년부터 2012년까지 268명이 수상하였다. 수상받은 3대 장로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수도권 지역에서 80명으로 29.9%, 충청지역은 9명으로 3.4%, 제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31명으로 11.6%, 강원지역 2명으로 0.7%, 이북지역 21명으로 7.8%로 각각 분포되었다. 그런데 영남지역은 125명, 46.6%로 압도적이다.
이렇게 3대장로가 영남지역에 편중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영남지역의 신앙적 유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퇴계학파가 이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처럼 영남지역의 신앙유형은 믿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따라 신앙생활을 한 결과로 3대 장로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같은 영남지역을 더 엄밀한 의미로 분류해 보면, 퇴계의 영향을 받은 경북지역은 105명으로 39%를 차지하지만 경남지역은 20명으로 7.4%에 불과하다. 이 역시 영남의 유학이 퇴계의 이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좌도인 경북과 남명의 의(義)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인 경남의 차이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신앙의 유형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경상우도인 경남지역이 신사참배반대로 믿음의 순수성을 지켰다면, 호남지역은 순교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으며, 경상좌도인 경북지역에서는 3대장로로 이어가면서 믿음을 지킨 결과가 오늘 우리나라의 믿음의 지형으로 살펴 볼 수 있다.
한 예를 든다면 영남지역의 목회자로 통합과 합동이 분열되기 전 총회장을 지낸 봉경 이원영 목사(1886-1958)를 들 수 있다. 이원영 목사는 퇴계의 14대손으로 안동군 도산면 원촌에서 태어났다. 봉경은 1908년 봉성측량강습소를 다녔고 1909년 보문의숙에 진학하여 선진 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사상과 민족주의 정신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그는 1919년 만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복역하는 중 유림출신인 이상동의 전도를 받아 1920년 출옥하고 1921년 1월 8일 크로더스(권찬영)에게 세례받았다. 세례를 받고 봉경이 살던 원촌에 교회가 없어서 1921년 섬촌에 교회를 세우며 섬촌교회당 설립일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원촌을 중심으로 전도하면서 조금 떨어진 섬촌에 교회를 건축하기로 하였지만 문중의 반대로 어려움을 겼다가 문중의 허락을 받고 섬촌교회를 건축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문중은 완공후에도 교회 철거를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중에도 봉경은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존댓말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봉경은 1920년에 입학한 안동성경학교를1925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다시 192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0년 졸업하였다. 그 후 봉경 이원영 목사는 영주 중앙교회, 이산 용상교회를 거쳐 1934년부터 안동 신세교회와 안기교회를 담임하다가 1934년부터는 안기교회만 담임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38년 안기교회를 강제로 사임당했다. 이후에 그는 시내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을 ‘오복사골’로 이름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1938년 봉경은 황민화정책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경안노회에서 목사직 면직을 당하였다. 1939년 5월 봉경은 일제에 검속되어 7월까지 고문을 받다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일경은 그가 거의 죽은 줄 알고 가족에게 통지하였는데 성소병원에서 극적으로 회복하였다. 회복된 후에도 봉경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투옥과 보석을 반복하는 중에 1945년 8월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11월 경안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된 봉경은 안기교회를 서부교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후 그는 1954년까지 노회장을 8번 역임하였다. 장로교가 두 번의 분열을 거친 후 1954년 제39회 총회가 안동에서 개최되었을 때 이원영 목사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장이 된 이후 봉경은 장로교 교단 분열의 원인을 신사참배로 보았기 때문에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성명서를 발표할 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로 인한 분열의 아픔을 달래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1946년 봉경은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성서신학원)을 설립하고 경안고등학교, 계명대학교 설립이사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다. 봉경이라는 호처럼 퇴계의 후손답게 위를 바라보면서 근본을 향하여 열심히 살아온 목회자의 정체성이 그에게 담겨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각 지역의 특성에 따른 신앙적 열정으로 지금까지 성장하고 발전하여 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속한 지역적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인식하고 아울러 다른 지역의 특성을 인정하여 함께 조화를 이루어간다면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 다가올 것을 확신하면서 필자의 글을 마치려한다.
지난 호에서 호남지역에 기독교 순교자가 집중된 이유를 호남지역의 기(氣)의 특성, 즉 ‘현상학적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영남지역의 이(理)의 특징인 본질에서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찾는 측면에서 3대 장로가 그 지역에 집중된 이유를 검토하면서 필자의 연구 주제인 “유학에서 찾은 교회의 성장”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영남지역이 호남지역보다 복음화율이 낮은 이유가 유교의 영향 때문이라는 단순한 설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영남지역이 호남지역보다 복음화율이 낮은 이유는 유교를 수용한 토양의 차이 즉 영남의 지역적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남 지역에서는 믿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기의 역동성이 순교로 나타났다. 이에 비하여 영남지역은 이의 본질을 중시하기에 믿음이 나타나는 현상을 예로 들기가 어려웠다. 영남지역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호남의 순교처럼 분명하게 드러낼 특징적인 것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필자가 우리 교단 전국장로회연합회의 창립40년사를 집필하던 중에 영남의 특징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영남지역에서 믿음을 지키는 방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조부(祖父)-부(父)-자기(自己)로 이어지는 ‘3대 장로신앙’이라는 점이다.
영호남의 지역적 신앙형태의 차이를 더 엄밀하게 살펴보면 유교의 사유체계가 양 지역에서 다르다는 것을 별견하게 된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영남지역의 복음화율은 인구대비 10-13%의 비율이지만 호남지역은 19-26%의 비율로 나타난다면 ‘3대장로’의 비율이 당연히 영남지역보다 호남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3대 장로를 처음 시상하기 시작한 1976년부터 2012년까지 268명이 수상하였다. 수상받은 3대 장로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수도권 지역에서 80명으로 29.9%, 충청지역은 9명으로 3.4%, 제주를 포함한 호남지역은 31명으로 11.6%, 강원지역 2명으로 0.7%, 이북지역 21명으로 7.8%로 각각 분포되었다. 그런데 영남지역은 125명, 46.6%로 압도적이다.
이렇게 3대장로가 영남지역에 편중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영남지역의 신앙적 유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퇴계학파가 이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처럼 영남지역의 신앙유형은 믿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따라 신앙생활을 한 결과로 3대 장로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같은 영남지역을 더 엄밀한 의미로 분류해 보면, 퇴계의 영향을 받은 경북지역은 105명으로 39%를 차지하지만 경남지역은 20명으로 7.4%에 불과하다. 이 역시 영남의 유학이 퇴계의 이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좌도인 경북과 남명의 의(義)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인 경남의 차이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신앙의 유형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경상우도인 경남지역이 신사참배반대로 믿음의 순수성을 지켰다면, 호남지역은 순교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으며, 경상좌도인 경북지역에서는 3대장로로 이어가면서 믿음을 지킨 결과가 오늘 우리나라의 믿음의 지형으로 살펴 볼 수 있다.
한 예를 든다면 영남지역의 목회자로 통합과 합동이 분열되기 전 총회장을 지낸 봉경 이원영 목사(1886-1958)를 들 수 있다. 이원영 목사는 퇴계의 14대손으로 안동군 도산면 원촌에서 태어났다. 봉경은 1908년 봉성측량강습소를 다녔고 1909년 보문의숙에 진학하여 선진 제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사상과 민족주의 정신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그는 1919년 만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복역하는 중 유림출신인 이상동의 전도를 받아 1920년 출옥하고 1921년 1월 8일 크로더스(권찬영)에게 세례받았다. 세례를 받고 봉경이 살던 원촌에 교회가 없어서 1921년 섬촌에 교회를 세우며 섬촌교회당 설립일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원촌을 중심으로 전도하면서 조금 떨어진 섬촌에 교회를 건축하기로 하였지만 문중의 반대로 어려움을 겼다가 문중의 허락을 받고 섬촌교회를 건축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문중은 완공후에도 교회 철거를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중에도 봉경은 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존댓말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봉경은 1920년에 입학한 안동성경학교를1925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다시 192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0년 졸업하였다. 그 후 봉경 이원영 목사는 영주 중앙교회, 이산 용상교회를 거쳐 1934년부터 안동 신세교회와 안기교회를 담임하다가 1934년부터는 안기교회만 담임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38년 안기교회를 강제로 사임당했다. 이후에 그는 시내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을 ‘오복사골’로 이름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1938년 봉경은 황민화정책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경안노회에서 목사직 면직을 당하였다. 1939년 5월 봉경은 일제에 검속되어 7월까지 고문을 받다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일경은 그가 거의 죽은 줄 알고 가족에게 통지하였는데 성소병원에서 극적으로 회복하였다. 회복된 후에도 봉경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투옥과 보석을 반복하는 중에 1945년 8월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11월 경안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된 봉경은 안기교회를 서부교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후 그는 1954년까지 노회장을 8번 역임하였다. 장로교가 두 번의 분열을 거친 후 1954년 제39회 총회가 안동에서 개최되었을 때 이원영 목사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장이 된 이후 봉경은 장로교 교단 분열의 원인을 신사참배로 보았기 때문에 신사참배결의를 취소하고 성명서를 발표할 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사참배로 인한 분열의 아픔을 달래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1946년 봉경은 경안고등성경학교(현 경안성서신학원)을 설립하고 경안고등학교, 계명대학교 설립이사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다. 봉경이라는 호처럼 퇴계의 후손답게 위를 바라보면서 근본을 향하여 열심히 살아온 목회자의 정체성이 그에게 담겨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각 지역의 특성에 따른 신앙적 열정으로 지금까지 성장하고 발전하여 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속한 지역적 특성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인식하고 아울러 다른 지역의 특성을 인정하여 함께 조화를 이루어간다면 새로운 부흥의 시대가 다가올 것을 확신하면서 필자의 글을 마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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