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8월 14일 "무엇을 하리이까" (사도행전 22:5-11)

관리자
2022.08.14 09:50 7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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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리이까" (사도행전 22:5-11)

(행 22: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 22: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22: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행 22: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후의 삶이 변화되어 새로운 방향으로 살아가게 됨을 봅니다. 오늘은 믿기 전의 바울과 후의 바울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1. 바울의 박해
바울은 변론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권위있는 자들인 당대의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은 바울이 유대교에 대한 열심히 빅해 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공문은 대제사장 개인의 명의가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의 명의로 되었던 것입니다.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생생한 동적으로 전달합니다. 다메섹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과 유대인 사이의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표현입니다. 회심하기 이전의 자신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이며 유대교에 자부심이 있던 자들입니다.
하루가운데 가장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오정보다 훨씬 강력한 큰 빛의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큰 빛은 많은 빛으로 오정에 내리쬐는 태양광고 구별되는 초자연적인 빛임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2. 예수님을 만난 바울
초월적인 빛에 압도된 바울이 엎드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보여주는 바울에게 들린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 않은 것으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반복해서 이름을 부른 것은 연민을 품은 애정이 가득 담긴 것으로 마르다야 마르다야, 시몬아 시몬아를 부른 것과 같습니다. 박해하느냐는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으로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박해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께 바울은 대답 대신 주님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은 당혹감으로 태양보다 밝은 빛에 엎드려진 바울은 빛 속에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주님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나사렛은 여러 이름과 구별하였습니다.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은 바울이 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빛은 보았으나 빛 가운데서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방관자에 불과하였고 바울만이 전 과정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3. 무엇을 하리이까 묻는 바울
오순절 강림이후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에 찔림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심정으로 예수님과 만난 바울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자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며 삶의 변화가 이어졌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아 신앙적 결단을 하고 위대한 족적을 남긴 경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들어가라는 것은 안으로를 뜻하는 것이기에 애초 목적지인 다메섹으로 계속 가라는 것으로 이전에는 다메섹에 흩어진 그리스도인을 결박하려 했지만 목적이 달라져 다메섹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기다리는 사람으로 다메섹 회심이 일순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계획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회심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치밀하고 영원한 계획속에 작정되었습니다.
바울은 강력한 빛으로 사흘이나 보지 못하고 아나니아의 안수로 보게 되었던 것(9:8)으로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던 바울은 혼자 힘으로 방향도 잡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이전의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의지는 온데 간데 없이 함께 한 사람들의 손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만 움직이며 살아가는 수동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모두 내려놓고 주님의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인 삶의 과정으로 변하였습니다. 의지로 무엇을 하려고 힘씀과 애씀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내일을 기대하며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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